란꽃에 대한 단상
란 꽃의 대한 단상
거제상문고 교사 강준호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6시 50분쯤 4층 진학실 문 앞에 섰다. 우리 반을 쳐다보니
어김없이 불이 켜져 있고 책상 끄는 소리가 들린다. 진학실을 들어서니 퀴퀴한 냄새가 난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 지금까지 맡아 보지 못했던 퀴퀴한 냄새 가운데
은근한 냄새가 섞여 난다. 무슨 냄새일까 기분 나쁘지 않게 내 코를
끄는 냄새. 퀴퀴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창문을 연다. 여전히 내 마음까지 이끄는 냄새.
3월 초 교장 선생님께서 란 하나를 주셨다. 교장 선생님 부임 인사로
교장선생님의 지인으로부터 보낸 온 화분이었다. 란을 키우지 못해
죽이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어 망설였다. 교장선생님이 교장실 안에
화분들을 늘어놓고 가져가라고 하셨다. 하나라도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 휩쓸렸다. 예쁘고 고급스럽게 보이는 화분에 잎이 무성하니
보기만 좋은 것을 골랐다. ‘란’ 종류는 모른다. 하동 금남에 살 때 우리
집주인이 란을 키웠는데 취미가 아닌 ‘사업’ 수준이었다.
그 때 집주인은 나와 만난 때마다 ‘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취미로
‘란’을 키워 볼까 생각도 했다. 집주인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그 생각은 사라졌다.
‘란’에 대해 관심을 끊었다. 그 당시 집주인의 억설로 얻어 들은 란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부이다. 지금은 대부분 잊었다. 그때 기억을 더듬어
우리나라 란의 90프로가 우리나라 산 천지에 피어있는 ‘춘란’이라고 했었다.
아마 내가 선택한 화분도 ‘춘란’일 것이다.
2층 2교무실 구석 내 자리 뒤에 사물함 위에 란을 두었다. 내가 알고
있던 기본적인 생육 방법으로 란을 키웠다. 내가 하는 일은 키우기 보다는
관리에 가깝다. 물을 줘야 한다. 매일 주면 안 된다. 가끔 줘야 한다.
한 번 물을 줄 때는 흠뻑흠뻑 줘야 한다. 햇볕도 쬐었다. 직사광선은 안 된다.
그늘도 만들어 줘야 한다. 매일 창문을 열어서 바람도 쐬었다. 관리를 잘 한다고 생각했다.
란 잎이 무성해지는 것 같더니 점차 말라죽었다. 말라 죽은 촉은 뜯어버렸다.
무성하던 란이 점차 화첩에 나오는 란같이 날씬해졌다. 아마 인사철에
란이 필요했던 주인이 여러 분의 란을 한 화분에 모아 무성하게 보이게 했던 것 같았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란’들은 나의 무성의한 관리로는 살아남기가 버거웠던 것 같다.
4층 진학실로 자리를 옮겼다. 란을 버릴까 생각하다가 같이 자리를 옮겼다.
진학실의 란 자리는 2층 교무실 보다는 좋다. 햇볕도 바람도 물도 충분하게 제공할 수 있다.
란이 비가 오면 좋아한다. 비가 오면 나도 란과 같이 활기차다.
계속해서 죽은 촉은 뜯어버리고 남은 촉만 관리를 했다. 화분의 전체적인 균형이 깨졌다.
화분 한 쪽으로만 11촉 남았다. 남은 촉들은 생기가 넘친다.
뭔 일이든지 저지를 것 같은 활기가 넘친다.
태양과 지구는 한 번도 고요하게 정지한 적이 없다. 충만한
대기(大氣)의 활동운화(活動運化)에는 잠시의 정지도 없으며,
인물에 흐르는 혈맥은 순간이라도 움직이지 않음이 없다.
이와 같이 왕성하게 돌아서 움직이는 가운데 어찌 일사일물(一事一物)이라도
운화를 따라 변동하지 아니함이 있겠는가?(최한기)
어느 날 문득 란 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아버지의
집에 가면 항상 군자란의 꽃이 피어있다. 란 꽃 보기가 힘들다는데
우리 아버지는 무슨 재주로 항상 꼭을 피우실까. 아버지 어머니
집에 가기만 하면 두 분 동시에 군자란 꽃이 피었다면 자랑하시며 보라고 하셨다.
나는 별 반응 보이지 않는다. 예! 꽃이 피었네요!
그런데 꽃은 예뻤다. 생각해보니 우리 아버지 집에 화분이 많은데 화분 마다
꽃이 피었던 것 같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 칭찬 잘 안 하시는데
이 부분에는 무한정으로 인정하셨다. 나도 란 꽃을 보고 싶다.
란 꽃은 보려면 란을 괴롭히면 된다. 겨울 날씨가 어느 해보다 혹독하면
그 겨울 다음에 봄에는 어느 해보다 더 아름다운 꽃들을 볼 수 있다.
생존 본능을 자극하면 된단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란을 괴롭히면 목표를 달성하기 전에 그 란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평소 때 하던 대로 그대로 했다.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이 사람에게 내리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心志)를 괴롭게 하며, 그 근골(筋骨)을 수고롭게 하고,
그 신체를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을 궁핍하게 하고, 행할 적에 그 하는
일을 어그러지고 어지럽게 하나니, 이는 마음을 움직이고 성품을 참아서,
그 능하지 못한 것을 더 능하게 함이다.(맹자)
내 자리에서 창밖을 보면 오작교가 보인다. 그 너머로 여러 개의 산마루가 보인다.
우리 학교 교사가 3동이 있는데 2동과 3동을 연결하는 통로가 있다.
그 통로를 학생들은 오작교라 부른다. ‘만남의 장소’ 오작교. 내가 알고 있던
오작교는 사랑이고 통일이었다. 산마루에 운무가 자욱하면 그런대로 볼 만하다.
평소 때는 산마루의 송전탑으로 산이 갑갑하다. 4층 진학실 창밖으로
조망할 수 있는 산마루들이 스스로 그러하다는 자연스러움이 없다.
란 꽃대가 피었다. 꽃망울이 다섯 개다. 꽃봉오리가 다섯 개다. 한 송이가 피었다.
두 송이가 피었다. 다섯 송이가 피었다. 아침마다 사진을 찍었다. 날마다 새롭다.
시간마다 새롭다. 찰라가 새롭다. 창문으로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타고
란 꽃 냄새가 코에 스친다. 냄새가 그윽하다. 냄새가 은은하다. 냄새가
물리지 않는다. 어느 누구라도 같이 있고 싶다. 같이 냄새에 취하고 싶다.
원초적인 본연의 심연과 만난다. 꽃이 멋있구나!
꽃 냄새가 맛있구나! 마음껏 취하고 싶다. 물심일여로구나!